2020/작가론

갈라진 틈으로 훔쳐보기 - 김방주 개인전 REVIEW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Yoon Taegyun 2020. 9. 8. 18:32

윤태균

1.
지하의 전시장을 들어가는 순간 펼쳐지는 것은 관객에게 주어진 스크립트이다. 어지러이 흩어진 판넬들에 적힌 매뉴얼처럼, 김방주는 어떠한 교조를 좇는 연극적 공간을 구성한다. 작가는 이 연극의 등장인물로서 자신의 신체와 수행을 공간과 함께 설치하며 작업이 지시하는 것들을 수행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작가가 맡은 역할, 미술관 지킴이로서의 김방주에게 말을 걸고 상호작용하며 전시가 수행하고자 하는 관계형성의 의도에 복무하게 된다.


(전시 전경, 촬영: 윤태균)

2.
니콜라 부리요의 관계미학은 예술을 특수한 상호성을 생성하는 장소로서 설명한다. 주류 사회의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체계에서 예술작품이 행할 수 있는 역할은 주류와는 다른 사회적 관계로 작용하는 ‘틈(interstice)’이라는 것이다. 사회의 지배적인 교환체계와 상징체계와는 다른, 대안적 관계의 공간을 상정하는 관계미학에서 예술은 지속적이고 능동적인 관계를 낭만적으로 실천한다. 관계미학에서, 만남과 관계는 예술작품의 ‘형태’와 ‘구성’을 발생론적 측면에서 설명한다.

관계미학은, 이러한 측면에서 순진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관계미학이 제시하는 ‘틈’은 오히려 작업을 둘러싼 수많은 수행적 개체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작업이 상영되는 무대 뒤에 꽁꽁 숨겨놓는다. 그것이 제시하는 것은 오로지 조명이 비추어진 무대와, 그곳에서의 국소적이고 일시적인 ‘관계’일 뿐이다. 작가의 노동, 생산, 가치, 제도, 그리고 작업 바깥의 서사는 관계미학에 복무하는 작업들에게 고려 대상이 아니다. 한 작업을 둘러싼 수 많은 객체들이 이루어내는 국지적 불화와 마찰들은 작업이 실행되는 순간만큼은 잠시 보류된다.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이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와 샹탈 무페(Chantal Mouffe)의 개념을 인용한 에세이에서처럼, ‘적대(Antagonism)’ 없는 관계는 민주주의의 작동 조건이 아닌 오히려 발생론적 안티테제이다. 직접 인용하자면 이 적대 없는 관계가 형성하는 장은 “정치의 장에서 유토피아를 분리해내는 것”이다. 끊임없는 의견교환과 가치의 충돌이 민주주의를 지속되게 한다. 끊임없는 적대의 과정보다 어느 한 가지가 채택된 결과만을 지향하는 것이 결국 파시즘으로 귀결됨은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은 ‘틈’보다는 은폐이고 베일이다. 관계미학의 교조를 따르는 다수의 작업들은 개념화의 미학과 결탁하여 유미적 시공간을 환상으로 그릴 뿐이다.

3.
미술관 지킴이는 기존 다수의 전시들에서 전시의 바깥으로 철저히 절단되었다. 지킴이는 전시장의 어떤 곳도 전유할 수 없으며 전시장을 유랑하고 공간에 결속된다. 지킴이는 전시장에서 없어야는 사람으로, 하지만 동시에 있어야 하는 사람으로서 모순적 당위를 가진다. 그렇다면 전시와 함께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애써 무시되었던 비가시적 전시장 지킴이를, 전시를 구성하는 중요한 구성원으로 가시화한 것은 어떠한 것을 산출하는가? 관객들은 (작가가 수행하는 역할인) 지킴이에게 말을 걸고, 답변을 듣고, 또 전시장 내부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지킴이를 바라본다.


(전시 전경, 촬영: 윤태균)

4.
예술에서의 노동과 생산 그리고 예술이 가지는 가치의 결정 요소에 대한 수용 가능한 논의들은 후기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체계에서 매몰되어 왔다. 미술관에 설치된 작품들의 이면에 자리한, 거론하기를 꺼리게 되는 이 주제들은 적어도 미술관에서 작품을 마주하는 관객들에게는 감춰지기 일쑤이다. 이 논의를 미술관으로 들여와 관객 앞에 들이민다면 어떨까? 관객은 예술가(의 지위를 가진 작가)가 작품을 생산하는 과정, 그리고 이렇게 생산된 작품을 마주하고 구매하며 전반적인 ‘과정’에 관여하게 된다.

5.
김방주의 작업은 관계미학이 지나치는 여러 적대와 불화들을 자신의 작업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은 관계미학이 제시하고자 하는 ‘틈’의 기능을 수행한다. 절단되어 분리되었던, 전시장에 들어서기 이전의 것들 그리고 전시장 바깥의 것들은 김방주의 작업이 미술관의 견고한 벽에 만든 갈라진 ‘틈’ 사이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6.
나는 예술이 수행하는 관계와 실천을 그것의 본질로 상정하여 사후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예술이 드러내는 관계의 질(quality)을 발생론적으로 추적하여 해명하는 것이 어떤 예술작품의 지속에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