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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현대 미술사

1920년대 한국의 ‘신흥 미술’에서 나타나는 비평의 양상

1920년대 한국의 ‘신흥 미술’에서 나타나는 비평의 양상

문채원

 

 1920년대 ‘신흥 미술’을 둘러싼 담론은 당시 어느정도 형성되었던 한국 예술 화단에서 미술의 방향성이 어떻게 논의되었는지 알 수 있는 지표이다. ‘신흥’이라는 용어는 일본이 서구 아방가르드 미술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한국으로 전해졌다. 일본에서는 당시 활발한 서구 문화의 수용으로 아방가르드 그룹 운동이 이루어졌으며, 20년대 후반에는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미술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러한 흐름이 한국에로 전해진 것이다. 한국에서 이러한 ‘신흥 미술’에 대한 논의는 예술가들과 문예지, 신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김복진은 미래주의, 입체주의와 같은 신흥예술은 “동적이고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예술”의 발흥이라고 보았으며 “유쾌한 파괴를 감행한다”고 서술했다. 미래주의와 볼티시즘(Vorticism)을 소개한 임화는 미래주의의 동적 표현을 이해하고 그것이 “과학 문명의 극도에 생활을 표상할려고 하는 것”으로 설명하였으며 그것이 현재 이전의 것을 배제하고 현재 이후의 것만을 주목한다고 개진했다. 이렇듯 미래주의, 입체주의, 다다, 표현주의 등의 아방가르드 미술에서 특히 당시의 청년들이 큰 공감을 표했던 것은 ‘다다’였던 것으로 보인다. 근대와 전근대가 교차하는 당시 사회의 복잡성은 청년들이 지녔던 막연한 부정에 대한 이유가 되었다. 고한용은 1924년 발행된 <개벽>에서 ‘따따이슴’에 대해 설명한다:

 

다다의 인생관은 알아먹기에 어려울 것이 없다. 무슨 깊은 이론이 있거나 뒤숭숭한 무슨 체계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근대적 의식 안에 부댁겨난 사람이면 곧 이해할 것이다.. 고민과 절망 가운데서 살아오든 나에게는 엇지나 고마운 주의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물론 그 철저한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그가티 쉽살히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서구 아방가르드의 유파들은 당대적 현실의 부면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며 당시 청년들과 접촉했다. 과도기의 절망이라기보다 현대성의 발현과 함께 등장하는 복잡함과 어지러움이라는 측면에서 상통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념적 공감은, 미술 운동으로 발화되지 못했다. 수많은 비평들이 오고갔으며 ‘신흥’ 유파들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었다. 당시 도출되었던 주된 담론은 입체파나 미래파가 부정과 파괴에 중독된 부르주아 미술에 지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판의 의견은 ‘민족적 정서와 사상을 바로 표현’ 하고자 하는 진영과 낭만적 유미주의자의 진영으로부터 건너왔다. 전자의 경우 형식을 극단적으로 파괴한다는 점에서 예술적 지속성에 의문을 제기하였으며 후자의 경우 인간의 물질적 본능만을 자극시키는 물질숭배라는 이유로 서구 유파들에 대한 비판을 전개했다. 이들이 주장했던 것은 예술이 현대의 부도덕한 물질문명의 형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도덕적 요구를 만족시킬 전통 혹은 민족적 고전을 현대적 형식과 결합시켜야 한다는점이었다.

 


[참고문헌]

김영나 (2010). 한국미술의 아방가르드 시론. 한국근현대미술사학, 21, 235-259

서유리 (2007). 전위의식과 한국의 미술운동. 한국근현대미술사학, 18, 24-38